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평가 == [[민중 십자군]]을 제외하고 보면 사실상의 첫 번째 원정인데 후일의 제6차 십자군과 함께 성지를 탈환한 성과를 거둔 십자군이다. 유일하게 왕이나 황제가 참가하지 않았고 당시 '[[영주(중세)|영주]]'들 몇명만으로 위의 영토들을 점령해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후대의 6차 십자군은 양자간에 합의하여 예루살렘을 매매했기 때문에 당시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십자군 원정에 비해 신앙심이 돋보이고 성공적이었던 1차 십자군은 매우 특이한 일이기도 하다. 이 성공으로 인해 유럽에는 십자군을 찬양하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교회에서는 신부들이 강론으로 기사들의 미덕을 매일같이 선전하면서 십자군 열기는 더 높아졌다. 진품 여부는 차치하고, 이 원정에서 성창이나 성십자가 등 성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미화한 작품들이 만들어지면서 후일 성배 탐색과 같은 성지 순례 + 성유물 발견 같은 유형의 문학적 모티브도 여기서 시작된다. 이때 나온 저술들은 십자군의 원정을 마치 그리스도의 시련처럼 묘사하는데, 이미 성공하는 것은 신의 뜻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중간에 만난 안티오키아 공방전 같은 고난들은 기사들을 시험하고자 신이 내린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험담에 고무된 서유럽 세계는 십자군의 성공을 확신하고 더 많은 십자군 지원자들이 모여들게 된다. 만약 첫 번째 십자군이 실패로 끝났다면 십자군 원정이 계속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예시로 처음에 성공하고 실패해서 도전하는 것과 처음부터 실패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이 실패했다면 역사는 상당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권의 [[이슬람]]권에 대한 첫 대규모 공격이다 보니[* 이미 정교회 국가인 [[동로마 제국]]이 10세기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십자군보다 먼저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을 가해 [[니키포로스 2세|크레타 섬,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요안니스 1세|진격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기에, 1차 십자군은 가톨릭 유럽의 이슬람권 심장부에 대한 첫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는 가톨릭 세력의 [[레콩키스타]]가 꾸준히 진행중이었지만, 1차 십자군에 비하면 점진적이었고, 또 위치도 이슬람의 중심지가 아닌 변방 이베리아 반도였다.] 유혈과 학살도 이 때 가장 심했다. 애초에 상당수의 십자군은 이런 학살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목적 자체가 정복이 아니라 성지 순례 비슷하게 흘러간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하다. 여담으로 [[히스토리 채널]]에서 2005년에 공개한 십자군 다큐멘터리에서 알렉시오스1세의 성격과 야욕 외교에대해 자세히 묘사되었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종교 사건 사고]][[분류:로마-튀르크 전쟁]][[분류:십자군 전쟁]][[분류:알렉시오스 1세]][[분류:이탈리아-그리스 관계]][[분류:11세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